인정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

로렌스는 교사다. (…) 그에게는 프레드라는 연인이 있다. 둘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사이다.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한 로렌스를 위해 프레드는 파티를 준비한다. (…) 한참을 망설이던 로렌스가 프레드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로렌스는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솔직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프레드는 충격을 받는다. 로렌스는 여장을 하기 시작하고, 프레드는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프레드는 로렌스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됐든,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중략)

그런 소재의 특수성에 갇혀 등장인물들이 서로 힘들어만 하다가 마는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정수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유로부터 발견된다. 그것은 매우 특이한 상황에서나 성립하는 특별한 종류의 고민이 아니다. 대개의 연애가 파장에 이르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다.

로렌스는 본 모습을 찾고 싶어한다. 그는 여자로 살고 싶다. 그를 바라보며 고통을 겪는 프레드를 이기적인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녀가 당황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금세 로렌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응원해주는 프레드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프레드와 로렌스는 결국 함께할 수 없다. 헤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랑이 변해요, 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한 것이다. 프레드는 이미 로렌스의 ‘다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자기 삶을 공유할 타인으로 ‘수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고 희생하고 이해해야만 성립되는 관계란 고통이다. 그걸 사랑의 위대함이라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애써 치장하려는 노력은 웃기는 짓이다. (…)

극복할 수 없는 다름을 타인에게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다름 그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만큼이나 저열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다.

로렌스는 자기를 찾았고, 앞으로도 그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프레드는 가정을 꾸렸고 자식을 키우며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 언젠가 프레드가 로렌스의 등에 써주었던 글귀를 떠올릴 것이다. “건강을 지킬 것과, 위험을 피할 것과, 과거를 잊고 희망을 가질 것을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해.” 다 이루어졌다. 허지웅(주간경향)

원글: 로렌스 애니웨이 – 허지웅

보통 다른 이의 블로그글은 최소한으로 옮겨오는 편인데, 이 글만큼은 이렇게 많이 옮겨올 수 밖에 없었다. (…)과 (중략) 표시로 내용을 마음대로 압축한 버전이니, 전체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위 링크를 타고 가시라. (사실 80% 정도 옮겨와서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성 정체성이란 소재로 ‘인정하는 것과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라는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 소재는 특수하지만 느끼는 바가 많다. 대개의 연애가 파장에 이르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라는데서 뜨끔…

상대방이 수용할 수 있는 얘기만 하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겠지만, 어떤 일들은 그래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나를 전면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지.

어쨌거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함께 하지는 못 하지만, 각자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도 그럴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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